
들어가며
‘쿠사리를 주다’, ‘쿠사리를 먹다’라는 말을 한 번쯤 들어보셨거나 써 보셨을 겁니다. 누군가에게 핀잔을 주거나, 또 반대로 한 소리 들었을 때 흔히 쓰이는 말이죠.
그런데, 이 ‘쿠사리(くさり)’ 어감부터 일본어 냄새가 풀풀 풍기지 않나요? 오늘은 이 단어가 진짜 일본어에서 온 말인지, 그렇다면 뜻은 무엇인지, 그리고 어떻게 이런 표현이 만들어졌는지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쿠사리의 뜻, 쇠사슬?
사전에서 くさり를 검색하면, 鎖 (쿠사리) '쇠사슬'이란 의미가 나옵니다. 영어로는 chain, 즉 무언가를 묶는 쇠사슬입니다.
그럼 '쿠사리를 주다'가 '쇠사슬을 준다', '쿠사리를 먹다'가 '쇠사슬을 먹는다'는 뜻일까요? 아무리 생각해도 좀 이상하죠. 🤔
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대사전에서의 정의가 쿠사리의 어원에 대해 힌트를 줍니다.
- 쿠사리(kusa[腐]ri)
- 「명사」 핀잔.
- (출처: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포인트는 ‘쿠사리’의 한자가 鎖(쇠사슬) 이 아니라 腐(썩다) 라는 점입니다. 즉, '쿠사리'라는 말이 쇠사슬과는 일절 관계가 없고, '썩다(腐る, 쿠사루)'에서 나온 단어 임을 알 수 있는 것이죠. 그러면 腐る (쿠사루)가 어떻게 쿠사리가 됐는지 더 살펴보겠습니다.
쿠사리의 어원 : 일본어 腐れ
욕이 많이 없다고 알려진 일본어에 아주 맛깔난 욕이 있습니다. 바로 腐れ (쿠사레)로 시작하는 말입니다. 이 말은 대상이 되는 어떤 명사 앞에 붙어서 '썩을' 혹은 '망할' 정도의 뜻을 더해, 어떤 대상을 비난하거나 비하하는 용법으로 사용됩니다. 아래와 같이 활용(?) 할 수 있습니다.
- 腐れ野郎 (쿠사레야로-) 썩을 놈, 망할 놈
- 腐れ縁 (쿠사레엔-) 끊을래야 끊어지지 않는 질긴 인연
- 腐れ坊主 (쿠사레보오즈) 파계승
- 腐れ教育 (쿠사레쿄오이쿠) 망할 교육 제도
- 腐れ金 (쿠사레가네) 더러운 돈
참고로, '똥'을 뜻하는 くそ를 결합시키면 더 폭발적으로(?) 상대를 비난할 수 있습니다.
最低のド腐れクソ野郎
최악의 개 망할 개객끼
'매우' '엄청'의 뜻을 가진 ど를 추가. ど는 한국어로 '개' 정도로 바꿀 수 있다
한국의 ‘쿠사리’ : 일본 욕이 생활 속으로
이런 일본어 ‘くされ’가 일제강점기 시기를 거치며 한국어로 들어와, 지금의 ‘쿠사리를 주다 / 먹다’ 형태로 굳어졌다고 보는 추측하는 견해가 많습니다. 일본어에서 접두사로 대상을 비난하는 사용법이 한국어에서 ‘쿠사리’라는 명사형으로 변하며,‘핀잔, 꾸지람’을 뜻하게 된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의미적 변화를 거쳐서 '쿠사리를 주다(핀잔을 주다)' '쿠사리를 먹다(핀잔을 듣다)' 로 자리 잡은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다만, くされ의 경우 일본어에서는 높은 수준의 비난을 표현하는 것과는 다르게, 한국의 '쿠사리'는 비난보다는 가벼운 혼남이나 핀잔 수준인 것이 다른 점이겠습니다.

왜 ‘먹다’인가? 한국어와 일본어의 먹는 욕
그렇다면 왜 굳이 '쿠사리를 먹다' 일까요? ‘쿠사리를 듣다’라고 해도 될텐데요.
한국어에서는 진짜 먹는 것 말고, 먹는 것과 유사한 것도 먹는 것으로 표현하고, 어떤 경험을 하는 것도 '먹는다'로 표현을 많이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약도 먹고, 술도 먹고, 나이도 먹습니다.
욕도 먹습니다. '쿠사리'는 비난을 당하는 일종의 '욕'이므로, 먹는 것으로 정착된 것이 아닌가 합니다.
재미있게도 일본어에도 비슷한 구석이 있습니다. 일본어에서 '먹다'는 食べる가 일반적이지만, 食う・食らう도 먹는다는 뜻으로 많이 쓰는 단어입니다. '쿠사리를 먹다'와 유사한 표현인 '잔소리를 듣다'는 일본어로 小言を言われる라고도 할 수 있지만, 小言を食らう라고도 쓸 수 있습니다. 말 그대로 잔소리를 '듣는다'는 말도 유효하지만, 잔소리를 '먹다'라는 표현을 한일 양국에서 같이 쓰는게 흥미로운 대목입니다.
일본어로 '쿠사리를 먹다' 를 말하려면?
그럼 일본어로 ‘쿠사리를 먹었다’를 그대로 번역해서 'くさりを食らった' 라고 하면 일본인은 알아들을까요?
아니요, 절대 알아 듣지 못할 겁니다. '쇠사슬을 먹었다고??' 아니면 '쇠사슬로 얻어 맞았다고??' 라고 이해하며 무슨 소리인지 반문할 것입니다. 대신 아래처럼 바꾸면 완벽하게 통할 것 입니다.
上司に小言を食らった。
상사에게 한 소리 들었다.
→ 食らった 대신 言われた로 변경 가능
部下に小言を言った。
부하직원에게 잔소리를 했다.
お母さんに叱られた。
엄마에게 혼났다.
→ 叱る의 수동형 (受身)을 활용한 표현
마치며
결국 ‘쿠사리’ 는 쇠사슬(鎖)이 아니라, ‘썩다(腐)’에서 온 일본식 욕이 한국어 속에서 변형되어 만들어진 일종의 '한본어'입니다. 일본어에서 영향을 받았으나, 일본어에서는 사용되지 않는 말 입니다. 아울러, '핀잔'이라는 완벽한 대체재가 있으니, 가급적이면 아름다운 우리말을 사용하는게 더 좋겠죠?
혹여나 일본사람을 만난다면, '쿠사리'라는 말은 알지 못하니, 小言を言う・叱る라는 표현을 사용해야 한다는 것도 잊지 마세요! from 비밀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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